이휘소가 한국에 오지않은 이유 삶 n 세상

이무렵 그는 조국인 한국에 무언가 기여해야 한다는 생각도 많이 하게된다. 한국에 대한 관심이야 꾸준했지만 그 전에는 한국 정부에 실망하고 있어 자신이 직접 어떤 일에 나서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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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휘소는 조국의 과학 기술 발전을 돕고 싶었다. 1971년 한국과학원 부원장인 정근모는 이휘소와 함께 물리학 하계 대학원을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사업을 적극 추진 중이었다. 하계학교는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이미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휘소의 구상은 상당히 구체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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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국에서 유신 체제가 강화되는 것을 보고 1972년 초, 정근모에게 서신을 보내면서 없었던 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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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선 개헌을 위한 유신이 일어나자 이휘소는 외국인 동료를 대하기가 부끄럽다고 가까운 한국 친구들에게 자주 말하곤 했다. 조국은 사랑하지만 한국의 독재 정권은 결코 인정할 수 없을 뿐더러 도울 수도 없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당시 강경식은 재미 한국과학기술자협회 부회장이었는데 모국 방문 학술회의나 하계 심포지엄의 연사 초청을 수락하도록 이휘소에게 권유했으나, 그런 정치 상황에서 한국 방문은 말도 꺼내지 말라고 거절하여 무안당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독재 정권이 있는 한, 결코 한국에 가지 않겠다던 이휘소는 그러나 2년 후 1974년 여름에 마침내 한국을 방문하게된다. AID 차관에 의한 서울대 원조 계획에 미국 측 심의위원 자격으로 귀국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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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집권 중에는 귀국하지 않겠다는 신조를 깨고 AID 사업으로 일시 귀국한 것은 신분 보장이 확실했다는 것이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다. 스탈린 치하의 소련에서 Kapitsa에게 일어난 일을 기억하는 이휘소는 미국 시민권 취득 이후에도 일시 귀국을 꺼려했었다.

Kapitsa는 소련 출신 물리학자였다. super-fluid 현상의 발견으로 노벨상을 받았는데, 1930년대 영국에서 활동하면서 명성을 떨쳤다. 스탈린은 Kapitsa의 귀국을 바랐으나 소련에 묶일 것을 염려한 Kapitsa는 신분 보장이 되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겠다며 거절했다. 그러자 스탈린이 직접 신분 보장 각서를 써 주면서 귀국을 종용했다. 그렇게 해서 그는 매년 여름마다 각서를 받고 소련을 방문했다.

그런데 어느 해에는 Kapitsa의 여름 방문 시기가 다가오는데 보증서가 도착하지 않았다. 대사관 관리는 행정적인 처리가 늦어지는 것 뿐이니 걱정하지 말고 우선 출발하라고 했다. 이미 여러 번 소련을 다녀온 Kapitsa는 별 의심 없이 귀국길에 올랐으나 그 해에 결국 소련에 억류되고 만다. 스탈린은 Kapitsa를 극진히 대접하며 소련의 물리학과 공업 발전에 기여하도록 도왔다. 후에 소련이 핵무기 개발에 성공했을 때 서방 세계에서는 Kapitsa가 주역이라 할 정도였다.

이휘소는 이 사건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한국 방문에 조심스러워했다. 그래서 전 해인 1973년 일본의 도쿄 대학을 방문했을 때 조차 한국에 오지않고 어머니가 일본으로 가 두번째 상봉을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미국 대표단의 한 사람으로 방문하는 것이니 한국 정부가 함부로 대하지 못할 상황이었다. 그래도 이휘소는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한국에 있는 동안 자신의 신변에 이상이 생기면 연락할 곳을 비서에게 상세히 알려주었다. 그가 학술회의, 연구방문 등으로 외국 여행이 빈번했지만 이런 적은 없었다.


- 이휘소 평전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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